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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씽이 덕수궁 속으로 쏘옥 들어가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했던 생활속의 공예품과

윌리엄 블레이크, 조선, 영국, 일본, 중국 및 기타 아시아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에 따라 진행되었던 그의 수집활동과 버나드리치와의 오랜 교우관계 등 문예사상가로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업적과 활동을 일본민예관 소장품을 통해 살펴 볼 수있었다.

 

전시소개 및 주요작품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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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근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 - 시라카바(白樺), 윌리엄 블레이크 그리고 버나드 리치

1910년대부터 일본의 미술계에서는 일본과 유럽의 교류를 도모하고 유럽예술계의 정보습득과 새로운 경향을 이입하려는 노력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잡지시라카바(白樺)1910년부터 1923년까지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문학가), 무샤노코지 사네야츠(武者小路實篤, 1885~1976, 문학가),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1891~1929, 화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81~1930, 종교 사상가) 등이 참여하여 기독교 신학을 비롯한 서양철학, 서양미술 등 서양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역할은 기획, 편집에서부터 표지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졌다. ‘시라카바동인은 잡지발간 이외에도 강연회, 전시회 등의 활동을 펼쳤고 1920년에는 시라카바미술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서양으로 눈이 향해있던 야나기는 1914년에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고, 19세기~ 20세기 초에 제작된 블레이크의 복제판화(William Blake, 1757~1827)를 수집하여 1919년에 윌리엄 블레이크 복제판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야나기는 1909년에 일본을 방문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로부터 에칭 제작방법을 배우고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를 접하게 되었다. 1909년부터 영국으로 귀국하는 1920년까지의 일본체류기간 동안 버나드 리치는 야나기에게 단순히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 겸 예술가로서 그를 통해 동서양의 예술관을 공유하는 예술동반자였다. 그들의 관계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리치가 서구에 야나기를 알림으로써 서구 공예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 1. 잡지 시라카바(白樺)(912), 1918 /표지 :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잡지 시라카바(白樺)는 이러한 예술계의 풍조를 잘 반영하여 철학, 종교, 문학, 미술을 종합적으로 다뤘던 잡지로서 1910년부터 1923년까지 발간되었다. 이 잡지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문학가), 무샤노코지 사네야쓰(武者小路實篤, 1885~1976, 문학가),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 1891~1929, 화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81~1930, 종교 사상가) 등이 참여하여 기독교 신학을 비롯한 서양철학, 서양미술 등 서양 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는 기획, 편집에서부터 표지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댕은 생전과 사후 추모 특집 기사로 다루어져 시라카바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자신의 소품 3점을 일본에 선물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직접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라카바동인은 잡지 발간 이외에도 강연회, 전시회 등의 활동을 펼쳤고 이들의 활동을 통해 로댕, 렘브란트, 세잔, 반 고흐, 고갱, 인상파 등이 소개되었다.

 

그림 2.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아담을 심판하는 신>(복제판화), 20세기초, 31.5x39cm, 종이에 채색판화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인, 화가, 판화가로 활동했는데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시 뿐만 아니라 미술작품을 통해서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고딕미술과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작품들은 인간의 육체적 힘과 정신을 함께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블레이크는 화면의 극적인 연출과 인물의 위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화면을 구성했던 미켈란젤로의 영향 이외에도 묵시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상상력이 넘치는 화면을 만들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성하며, 미를 통해 출현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블레이크의 사상은 야나기와 버나드 리치에게 영향을 주었고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과 서양의 구분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영구적인 예술을 꿈꾸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점차 블레이크를 통해 야나기와 버나드 리치는 조선의 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서양으로 눈이 향하고 있던 야나기는 1914, 25세에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그의 생애와 제작 및 사상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또한 야나기는 20세기 초에 제작된 블레이크의 복제판화를 수집하여 1919윌리엄 블레이크 복제판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림 3.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숲 속의 호랑이>, 1946, 65.5x65.5cm, 철사로 그린 도판(陶版)

 

야나기는 1909년에 일본을 방문한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로부터 에칭 제작방법을 배우고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를 접하게 되었다. 버나드 리치는 시라카바 동인들과 함께 어울렸고 잡지 제작에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야나기와 버나드 리치와의 교유(交遊)관계는 특별했다. 버나드 리치는 홍콩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동양 문화를 접하였고 일본문화에 매료되었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 도자, 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양 미술의 재료와 제작 방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야나기와의 교류가 뒷받침되었다. 1909년부터 영국으로 귀국하는 1920년까지의 일본체류기간 동안 버나드 리치는 야나기에게 단순히 서양미술을 소개하는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이자 그를 통해 동서양의 예술관을 공유하는 예술 동반자였다. 그들의 관계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서구에 야나기를 알림으로써 구미(歐美)공예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은 전후 그의 작품 중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서 4장의 타일로 구성되어 독특한 디자인의 철제 테두리로 형태를 잡은 작품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림은 목판화 작품으로 제작했던 시라카바1913년의 표지를 다시 철유로 그린 것이다. 작품의 윗부분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호랑이>(경험의 노래, 1794))시의 일부분(‘Tyger! Ty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을 삽입하였고 아랫부분은 호랑이, 나무 그리고 소녀를 그렸다.

 

2: 조선과의 만남 : 동양의 조형미에 대한 인식

 

야나기가 조선도자기를 접한 시점은 1909시라카바활동을 준비할 무렵 골동품점에서 모란무늬 항아리 한 점을 구입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심이 조선으로 향하게 된 것은 조각가였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로부터 선물받은 조선시대 도자기 한 점을 보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사카와 형제들의 도움으로 그는 경성(현 서울), 경주 등 잘 알려진 도시를 비롯한 계룡산 가마와 같은 공예품 생산지를 여행하여 수집을 행하였다. 그가 수집했던 공예품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지 않았던 것들을 수집하였는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도자기를 시작으로 하여 가구, 각종 기구, 회화, 자수, 금속공예, 목공예, 석공예 등 전방위에 걸쳐져 있다. 야나기는 이러한 공예품에는 조선민족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고,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야나기는 조선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소실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고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야나기는 이러한 수집활동을 통해 전개했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미에 대하여 나름의 견해를 내세웠다. 1916년부터 1940년까지 21차례에 걸친 조선 여행을 통해 야나기의 조선예술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점차 변화하여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예술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것으로서 무심’, ‘무작위’, ‘무의식과 같은 개념으로서 설명하였다. 20세기 초 한국에서 미술사에 대한 개념과 지식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그의 미학은 일본이 창출한 조선의 이미지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고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예술이 야나기의 미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동양사상과 종교의 구태의연한 전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구근대문화와 기독교사상을 추종하였던 야나기의 시각과 사상을 동양을 회귀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동양미의 재인식은 이후 그의 예술론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도록 이끌었으며 종교미술, 민예론에 대한 체계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림 4. 조선, <철사 운죽문 항아리>, 17세기, 24.7×22.5cm, 도자기

19168월 야나기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 부산에서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영접을 받았다. 곧이어 그는 부산의 고물상에서 이 작품을 보고 구입하였고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조선 도자기의 수집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이 고려청자에 집중되어 있던 반면 조선시대 백자를 주목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좋은 조선백자를 구할 수 있었다. 지속적인 조선 여행을 통해 그는 조선시대 도자기와 도공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는 조선시대 도자기에는 ()’()’가 있어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게 만드는 미의 신비가 있다고 말한다. 야나기는 이 작품을 철자로 그림을 그린 호 중에서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고 철사의 독특한 필치가 자유롭고 단순하게 그려졌다고 평가하며 그 자유로움이 특히 강하다고 말한다.

 

 

 

3: 주변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예

 

동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야나기의 시각은 이제 중국, 만주, 일본 등지로 확대되어 야나기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차례 중국을 방문하였고 여러 지역의 공예품을 수집하였다. 조선과 중국 여행을 통해 받았던 문화적 영향이 컸던 만큼 야나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서양으로의 관심을 동양으로의 관심으로 바꾸었다. 야나기는 1924년 모쿠지키의 불상을 우연하게 발견한 이후 소박하고 건강하며 동시에 깊은 종교적 의미를 담은 이 불상에서 특별하지 않은 미를 발견하였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쿠지키의 불상을 조사하였고 일본 전국에서 300개 이상의 불상과 자필문서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그는 모쿠지키쇼난연구(上人之硏究)(7) 저서(1925)를 발간하여 모쿠지키에 대한 재발견의 계기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한편 야나기는 모쿠지키 불상 조사 중 맞닥뜨린 대중적이면서 흔한 공예품으로부터 무명의 사람이 제작한 평범한 물품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민예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 말은 민중적 공예라는 의미로서 민간에서 사용되는 일상품을 의미하며, 고급미술을 의미하는 예술보다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실용적인 공예를 강조하게 된다. 야나기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 본토, 아이누, 류큐 등지의 민예품에도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수집하였다. 야나기가 수집했던 지역의 민예품은 대부분 자연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들이었다. 이론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야나기에게 수집이란 하나의 관점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통일하는, 일종의 창작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야나기는 이러한 수집행위를 창작하는 수집이라고 말하며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생활을 밝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예의 개념설정, 나아가 민예운동, 민예관의 설립 등 그의 노력은 옛날 것의 보존과 계승을 위한 퇴보적인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사용되고 발견되는 일상적인 것의 가치를 통해 내일의 창조를 이끌어나가려는 시도였다.

그림 7. 모쿠지키 쇼닌, <허공장보살상>, 1801, 73 x 26cm, 나무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41월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야마나시 현 이케다무라의 고미야마 세이조우(小宮山, 1880~1933)가 수집한 조선도자기를 보러 갔을 때, 그의 집에서 불상 2점을 발견하면서 그 불상을 제작한 모쿠지키 쇼닌(上人)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유명하지 않았던 모쿠지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던 탓에 야나기는 각지를 다니며 모쿠지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모쿠지키의 생가를 방문하고 그의 자필로 된 자서전을 발견하는 등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야나기의 모쿠지키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모쿠지키오행연구회가 결성되어, 1925(다이쇼 14) 3월에서 12월에 걸쳐 야나기 무네요시가 편집한 연구잡지 모쿠지키 쇼닌 연구5권과 특별호 1권이 간행되었다. 또한 이것과는 별개로 모쿠지키 오행 쇼닌 약전모쿠지키 쇼닌 와카(和歌:일본 고유의 정형시) 선집2권도 연구회에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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